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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스 컬렉션' 뒷마당 같은 정원 헌터 코트야드[이한빛의 미술관 정원]

등록 2024-04-27 10:56:03  |  수정 2024-04-30 10: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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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스컬렉션 전경. 미국 워싱턴 D.C.에서도 싱크탱크와 외교관저가 몰려있는 듀퐁 서클의 주택가에 위치해있다. 붉은 벽돌의 미술관은 원래 필립스 가족이 살던 저택이었다. [사진=이한빛] *재판매 및 DB 금지


[워싱턴=뉴시스] 이한빛 미술칼럼니스트 = 목표는 간단했다. ‘국가적 위상을 높일 미술관’.
간단할 뿐이지 쉬운 것은 아니었다. 개인 컬렉션을 미술관으로 바꾸겠다는 결심을 한 젊은이는 구매량을 폭발적으로 늘렸다. 1년 사이에 70~80점을 사들였으니, 매주 한 점 이상이 소장품 리스트에 추가됐다. 이 청년은 돈 되는 마스터피스에 집중하기보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자국 작가를 집중적으로 모았다. 5~6점이 자국 작가라면, 1점 정도가 유럽 작가였다.

왜 굳이? 라는 질문에 그는 자랑스럽게 답했다. 아예 잡지에 글을 써서 공개적으로 알렸다. ‘새로운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들 (Representative American Painters of New Century)’, 그러니까 미술에 관심이 커진 대중들에게 미국 미술에 대해 알리겠다는 목표였다. 때는 1919년, 필력으로 이름깨나 날렸던 던컨 필립스(1886-1966)의 ‘필립스 컬렉션’이다.

◆집을 미술관으로
필립스컬렉션은 미국에 동시대미술을 처음 소개한 것으로 평가된다. 1920년대이니, 당시의 동시대미술은 인상파를 필두로 ‘모던’(현대)을 고민하던 시류였다. 미술관은 미국 수도인 워싱턴 D.C.에서도 싱크탱크와 외교관들이 몰려있는 듀퐁 서클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깔끔한 주택가에 위치해, 처음 찾아가면 이곳이 미술관인지 아니면 규모가 큰 오랜 저택인지 살짝 헷갈릴 정도다. 붉은 벽돌의 저택엔 주의해서 보면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필립스 컬렉션’ 팻말이 붙어있어, 제대로 찾아왔다는 것을 알려준다. 오래 보아야 보이는 것은 들꽃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다.
 
현재 필립스 컬렉션의 규모는 5000점을 넘는다. 던컨 필립스와 마조리 애커(Marjorie Acher) 필립스 부부가 1921년 시작, 시간이 지날수록 규모가 커진 것이다. 부부가 생존했을 때 이미 르노아르, 보나르, 브라크 등 유럽 모더니즘 거장들의 작업을 비롯, 마크 로스코, 애드워드 호퍼, 조지아 오키프 등 미국 거장들까지 3000여점을 모았고 이후 미술관이 자체적으로 구매 및 기증받아 컬렉션은 지금에도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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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던 집을 미술관으로 바꿔서 일까. 미술관이 아니라 슈퍼리치의 프라이빗 컬렉션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방으로 향하는 복도엔 몬드리안의 작품이 아무렇지 않게 걸려있다. 사진=이한빛]  *재판매 및 DB 금지


미술관이 주택가에 들어선 것은 원래 주택이었기 때문이다. 필립스컬렉션은 1920년 7월 23일 던컨 필립스와 그의 어머니가 ‘필립스 메모리얼 갤러리’(Phillips Memorial Gallery)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아버지인 메이저 디. 클린치 필립스(Major D. Clinch Phillips)와 형인 제임스 필립스(James Phillips)를 기리기 위해서다. 두 사람은 1917년과 1918년 스페인독감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든든했던 아버지를 잃은 것도 모자라 어릴때부터 유독 사이가 좋았고 예일대에서 동문수학하기까지 했던 형까지 갑작스럽게 떠나 보내자 던컨은 이를 잊고자 미술 컬렉팅에 전념했다고 고백한다. 1926년 출판한 그의 책 ‘A Collection in the Making’에 따르면 “잃어버린 나의 지도자- 아버지와 형-의 정신을 받들고, 건설적으로 사회적 책무를 다하고자 기념관(Memorial)을 만든다”고 적었다.

필립스 메모리얼 갤러리는 그렇게 자신의 저택에서 시작했다. 집의 일부분을 전시공간으로 활용한 것이다. 개인 컬렉션이 공공미술관으로 성장한 것은 이로부터 약 1년여의 시간이 지난 1922년이다. 필립스는 워싱턴 신문을 통해 “2월 1일부터 6월 1일까지 매 화, 목, 그리고 토요일 오후에 일반 관객에게 공개한다”고 알렸다. 단순히 소장품을 늘리고, 외부에 대여해주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제대로 된 전시로 ‘현대미술’을 대중에 알리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이후 워싱턴 힐튼호텔부지에 공공미술관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며 공격적 행보에 나섰지만, 결국 실행하지 못했다.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침체의 영향에다, 그럼에도 좋은 작품을 확보하기 위해 써버린 예산이 너무 많아서다. 필립스 부부가 1929년 새 거주지로 이사함에 따라, 원래 살던 저택이 미술관으로 변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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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스컬렉션 정원인 헌터 코트야드(Hunter Courtyard)에 설치된 엘스워스 캘리의 ‘무제’. 사진=이한빛] *재판매 및 DB 금지

현재 필립스 컬렉션은 두 개의 건물이 구름다리로 이어져있는 형태다. 두 건물의 외형이 유사해 유심히 보지 않으면 한 건물처럼 보인다.

필립스 가족이 살던 곳은 그 상태 그대로 보존하면서, 작품이 걸린 전시장으로 쓰이고 새로 지은 건물은 미술관 본관으로 쓰이고 있다. 리모델링을 거쳐 화이트큐브의 느낌이 나지만 기본적으로 오랜 건물을 전시장으로 바꾼 것이라 계단이나 회랑, 기둥은 그대로 있다. 미술관을 위해 지어진 건물과 달리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까. 전반적으로 아늑한 느낌이다.
 
유명 미술관이면 으레 갖추고 있는 정원도 정원이라기보다 뒷마당에 가깝다. 그래도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카페도 있다. 협소한 공간 탓에 거대한 조각이나 설치물이 들어서진 못하지만 벽에는 부조 작품들이 걸렸다. 엘스워스 캘리의 ‘무제’, 바바라 헤프워쓰의 ‘듀얼 폼’은 야외 정원의 터줏대감이다.

 ‘미술관’ 하면 화이트큐브에 작품을 놓고 일상과 단절된 상태로 감상하는 것을 떠올리지만, 이렇듯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작품을 만나는 것도 가능하다. 따지고 보면, 예술이란 우리 삶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탄생하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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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 작 ‘선상 위의 오찬’을 감상하는 관객들. 사진=이한빛 *재판매 및 DB 금지

◆선상 위의 식사부터 마크 로스코 룸까지 컬렉션 하이라이트
필립스컬렉션 하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주옥 같은 컬렉션이 있다. 그중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은 피에르 오귀스트 르노아르(Pierre Auguste Renoir, 1841-1919)의 ‘선상 위의 오찬’(The Luncheon of the Boating Party, 1880-81)다.

메인 갤러리 2층 가장 중앙 방에 위치한 작품은 늘 관객으로 북적인다. 작품 앞에 놓인 의자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작품을 감상하는 이도 쉽게 눈에 띈다. 가끔은 바닥에 앉아 넋을 놓고 바라보는 관객들도 있다.

‘선상 위의 오찬’는 르누아르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 사이즈(130.0x201.0cm)와 스타일에서 독보적이다. 인물의 묘사와 공간에서 배치도 역동적이고 흥미로운데, 밝은 색채와 붓터치, 강가의 빛을 담아내는 인상주의적 묘사가 압권이다. 등장인물도 모두 작가의 지인들이다.

강아지를 어르고 있는 여인은 알린 샤리고(Aline Charigot)로 후에 르누아르와 결혼한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인상파 화가이자 후원자인 구스타프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바로 옆에 앉은 여성은 여배우인 안젤 레고(Angèle Legault), 그녀의 의자를 손으로 짚은 남성은 이탈리아 기자인 아드리안 마지올로(Adrien Maggiolo)다. 샤리고 뒤 난간에 손을 짚고 선 남성은 알퐁소 푸르네즈 주니어(Alphonse Fournaise Jr.)로 이 배의 주인 아들이고, 같이 난간에 기대 선 여성은 여동생인 루이즈 알퐁시네 푸르네즈(Louise-Alphonsine Fournaise)다. 루이즈와 이야기 하고 있는 남자는 기병대 장교출신인 바론 라울 바비에르(Baron Raoul Barbier), 유리잔으로 와인을 마시고 있는 여인은 배우 앨런 안드레(Ellen Andrée), 그녀를 등지고 신사모를 쓴 남자는 미술잡지 편집장이자 미술사학자인 찰스 에르푸시(Charles Ephrussi)다.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흥미롭지만, 사실 누가 누구인지는 그닥 중요하지 않다. 르누아르가 자신 지인들과 보낸 평범하고도 즐거웠던 오찬을 화폭으로 데려와 영원성을 부여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 부드럽고 시원한 바람을 배경으로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나누어 먹고 기분좋게 술에 취했던 젊은 시간이 우리 앞에 끊임없이 펼쳐진다.

던컨 필립스도 이 작품의 진가를 알아봤다. 1923년 파리 화상인 폴 뒤랑뤼엘로부터 그림을 사들이자 마자 흥분해서 “마침내 전세계 최고의 그림 중 하나를 소유했다…. 이 그림은 어딜 가든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편지를 썼다. 그리고 그의 평가는 2024년에도 유효하다.

이 ‘선상 위의 오찬’을 필두로 던컨 필립스는 유럽작가들의 수작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들라크루아의 파가니니, 마네의 트레이를 든 소년(Boy Carrying a Tray)도 이때 수집했다. 엘 그리코, 쿠르베, 푸뷔 드 샤방의 작품도 컬렉션 리스트에 올랐다. 1925년에는 또 다른 프랑스 작가인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의 작품과 만난다. 따뜻하고 독특한 색감, 과감하면서도 섬세한 구도가 인상적인 피에르 보나르의 화풍은 던컨 필립스를 무장해제 시켰다. 부부는 보나르의 작품을 무척 좋아해 총 1954년까지 총 17점을 컬렉션했고, 미국에서 처음으로 작가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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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보나르의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들. 피에르 보나르는 필립스 부부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였다. 사진=이한빛] *재판매 및 DB 금지

또 다른 컬렉션 하이라이트로는 마크 로스코가 있다. 러시아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며 추상표현주의를 이끌었던 그의 작품을 던컨 필립스는 무척 아꼈다. 언제부터 매료됐는지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로스코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테오도로 스타모스는 자신이 던컨 필립스에게 로스코를 추천했다고 한다. 보나르의 색채와 로스코의 색채의 연관성을 이야기해 던컨이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던컨은 로스코의 작품을 1956년부터 사들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1960년 미술관을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로스코 룸’을 만든다. 작은 방이지만 사방을 회색으로 칠하고, 모든 벽에 로스코 작품을 걸어 마치 작품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로스코는 자신의 작품을 한 점씩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작품을 한 자리에 걸고 감상하며 명상하듯 보라고 강조했는데, 필립스컬렉션에서 가장 근접한 감상 환경을 만들어 낸 셈이다.

◆평론가 출신, 그 철학에 따른 컬렉션
시간이 지나도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컬렉션을 만든 컬렉터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컬렉션에 대한자신의 철학이 확고하다. 던컨 필립스도 예외는 아닌데, 특히 예일대에 다니면서 예술전문잡지를 만들만큼 미학에 빠져들었고, 동시에 글에 대한 욕심도 상당했기에 많은 에세이를 남겼다. 덕분에 후대인 우리들은 컬렉터의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 있다.

필립스 컬렉션은 인상파 이후 유럽 모더니즘 거장들의 수작이 많다. 또한 전후 미국에서 일어난 추상회화도 수준 높은 컬렉션을 자랑한다. 모더니즘을 미국에 가장 처음 소개했다는 것도 모두 던컨 필립스의 안목과 뚝심에서 출발했다. 1920년대만 하더라도, 미국에선 인상파 이전의 고전주의 작품을 최고로 쳤다. 인상파 이후의 작품은 이런 전통을 흐리는 것으로 간주됐다.

이처럼 ‘단단한’ 컬렉션을 만든 던컨에게 최고의 조력자는 아내인 마조리 애커였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던 그는 1921년 결혼한다. 이후 평생을 작가로 활동했으며 남편에겐 동료이자 아트 어드바이저로 살았다. (필립스컬렉션에 가면 마조리의 작업이 여전히 걸려있다) 던컨의 사망 이후엔 필립스컬렉션의 관장을 1966년부터 1972년까지 역임했다.

마조리가 아니었다면 필립스컬렉션은 다른 형태를 갖추었을지도 모른다. 아내를 만나기 전 던컨은 미국작가를 지원하는데 의의를 뒀다. 뉴욕의 클럽하우스인 더 센츄리 어소시에이션(The Century Association)에서 1920년 가을 개최한 전시에 43개 작품을 내놓으면서 “미국 미술의 풍부함은 다른 미국 토종 예술가들에게 자극을 주고 영감을 준다”고 강조했다. 심지어 모더니즘 작가들을 혹평하기도 했다. 1913년 아모리쇼를 다녀오고 나서 던컨은 앙리마티스를 ‘불쾌한 사람’이라며 “어린아이와 미개한 야만인의 단순한 무지에 어울리지 않는 패턴, 조잡할 뿐만 아니라 고의적으로 거짓이며 미친 듯이 혐오스러울 정도로 타락한 패턴을 창조”한다고 비난했다.

큐비즘에 대해서는 더 심했다. ‘우스꽝스럽다’는 것이 그의 평이었다. 할아버지가 피츠버그에서 은행가이자 철광산업으로 큰 돈을 벌고, 아버지는 유리사업으로 백만장자였던 ‘금수저’ 엘리트 소년의 세계는 아내를 만나면서 바뀌고 성장했음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필립스컬렉션이 던컨 컬렉션이 아니라 ‘부부 컬렉션’으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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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 The eye of Duncan Phillips: a collection in the making, Erica D.Passantino, editor, David W. Scott, consulting editor. Yale University Press 펴냄,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