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Pick

미국 대부호가 뿌린 선의의 씨앗 [이한빛의 미술관 정원]

등록 2024-04-20 06:00:00  |  수정 2024-04-20 06:28:51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③·끝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 앤드류 멜론의 초상화. (사진=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이한빛 미술칼럼니스트 =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National Gallery of Art)는 엄밀한 의미의 ‘국립’ 미술관은 아니다. 지금도 국가가 운영자금을 지원하지만 작품 구매와 필요비용은 펀딩을 통해 충당한다. 대부호이자 슈퍼 컬렉터로 꼽히는 미첼 레일즈가 대표직을 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미국을 대표하는 내셔널 갤러리를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내셔널 갤러리의 탄생에는 슈퍼 리치이자 컬렉터였고 미국 재무상을 11년간 지낸 앤드류 멜론(1855~1937)이 있다. 그는 앤드류 카네기, 헨리 클레이 프릭, 존. D. 로커펠러 등과 함께 20세기 초 미국 경제의 기틀을 다진 ‘경제 대통령’ 중 하나다. 카네기가 철강 산업을, 프릭이 코크스 산업을, 로커펠러가 석유 산업을 이끌었다면 멜론은 점유한 분야가 없었다. 은행업(‘Mellon National Bank’)을 아버지 대부터 운영하긴 했지만 금융 산업에 헌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당시 미국 3위 재벌로 꼽힌다.

그는 은행을 통해 될 만한 사업에 돈을 빌려줘 회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돕고 그 대가로 주식을 받는, 요즘 말로 하면 ‘엔젤 투자자’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피츠버그에 기반한 알루미늄 회사인 ‘알로카’(Aloca)와 글로벌 정유회사인 ‘걸프 오일 컴퍼니’(Gulf Oil Company)다. 이외에도 조선회사인 ‘뉴욕 쉽빌딩 코퍼레이션’(New York Shipbuilding Corporation), 위스키 브랜드인 ‘올드 오버홀트’(Old Overholt), 철도용 차량 제조사 ‘스탠다드 스틸 카 컴퍼니’(Standard Steel Car Company), 화학회사인 ‘코퍼스’(Koppers) 등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의 대표 회사들이 멜론의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멜론의 전기(‘An American Life, Mellon’)를 쓴 데이비드 카나딘은 “될성부른 떡잎에 투자하고, 그 결실을 나누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이 성공하면 본인도 성공하도록 구조를 짰다. 이 비즈니스 방식은 내셔널 갤러리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자기 돈을 넣고, 컬렉션을 기부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본인의 컬렉션을 레버리지 삼아 내셔널 갤러리가 더 훌륭한 컬렉션을 갖추기를 바랐던 것”이라고 평한다.

◆美 대표 미술관, 그 시작은 인테리어?

은행을 운영할 만큼 부유한 집안의 넷째 아들인 앤드류 멜론은 미술엔 큰 관심이 없었다. 당시의 피츠버그는 번화한 뉴욕이나 트렌드를 이끌던 유럽 도시와 달리 석탄산업 비중이 큰 공업도시였다. 문화 자체를 즐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미술보다는 문학과 연극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런 그가 작품을 처음 산 것은 뒤늦은 결혼 때문이었다. 멜론은 45세에 결혼했는데, 상대는 영국 기네스 맥주회사의 딸로, 불과 20살이었다. 결혼 때문에 미국으로 (그것도 깡촌으로!)이주하게 된 어린 신부를 위해 멜론은 집을 꾸밀 목적으로 컬렉션을 시작한다. 아내가 집에서라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19세기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사들였다. 그러나 결혼이 파경으로 치닫자, 컬렉션을 안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팔아치우기까지 했다.

두번째 컬렉션도 인테리어 데코용이었다. 이번엔 딸을 위한 소비였다. 피츠버그 우드랜드에 좀더 큰 집을 마련한 멜론은 딸을 상류사회에 데뷔시키고 그곳에서 자리잡게 하기 위해 작품을 다시 사들인다. 마찬가지로 풍경화, 여성 초상화 등 자신이 즐기기 위한 용도로 샀을 뿐이다.

세번째 컬렉션은 재무상을 역임하면서 시작한다. 1921년부터 1932년까지 11년을 지냈는데, 세명의 대통령을 연속으로 보좌했다. 워런 G. 하딩, 캘빈 쿨리지,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멜론을 재무상으로 기용한 것이다. 다만 그가 재임 중이던 1929년 대공황이 터졌고, 그 여파로 1932년 사직한다. 그때부터 1년간 미국 대사직을 맡아 영국으로 건너간다. 이때 컬렉션은 워싱턴DC에 있는 자신의 펜트하우스 인테리어용이었다. 집이지만 동시에 공적 공간이기도 한 펜트하우스를 꾸미기 위한 선택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 시기 영국 출신 딜러인 조셉 두빈과 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둘의 첫 만남은 1913년 뉴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멜론의 슈퍼 컬렉터 자질을 간파한 두빈이 그를 스토킹하다시피 쫓아다니며 막강한 세일즈를 펼친다. 노련한 사업가인 멜론은 두빈의 제안을 번번이 거절했지만, 그렇다고 쳐내지도 않았다. ‘밀당’ 끝에 두빈은 토마스 로렌스 경의 초상화 ‘레이디 템플턴과 아이’를 25만 달러에 판매했다. 큰 거래가 성사된 것이다.

◆앤드류 멜론, 역사에 남을 미술관을 만들다

멜론의 마지막 컬렉션 시기는 1930년 이후로 꼽힌다. 그보다 앞선 1926~1928년 사이 그는 건축에 관심을 기울인다. 정확하게는 워싱턴의 재개발과 도시 미화였다. ‘랑팡 플랜’은 오래 전에 미완으로 끝났고, ‘맥밀란 플랜’도 힘을 일어가던 때였다. 멜론의 표현에 따르면 백악관과 의사당 사이는 “주유소, 여관, 중국 세탁소”로 가득했다. 심지어 연방 행정부들이 사무실을 빌리느라 매년 수십만 달러의 세금을 낭비했다.

연방빌딩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던 멜론은 연방 행정부들이 모여 있는, 이른바 ‘페더럴 트라이앵글’ 구조를 짜는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이때 프로젝트 안에는 국립미술관인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두빈은 자신이 멜론에게 내셔널 갤러리의 필요성에 대해서 가장 먼저 일깨웠다고 주장하고(1923), 아들인 폴 멜론은 아버지가 1927년에 들어서야 내셔널 갤러리를 짓겠다고 결심했다고 설명한다. 멜론의 1928년 9월3일 일기에는 “딸이 전화를 걸어 정부에 미술관을 줄 생각이냐고 물었다”고 적혀있다. 시기는 명확치 않지만 멜론은 오래 전부터 국립미술관 건립을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 앤드류 멜론은 마지막 컬렉션 시기 이탈리아 거장의 회화, 종교화를 집중적으로 사들인다. 이 중에는 라파엘 산치오의 ‘알바의 성모’도 포함돼 있다. (사진=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마지막 컬렉션 시기에는 이전과 판이하게 다른 양상을 보인다. 북유럽 풍경화나 아름다운 영국 여성의 초상화 혹은 평화로운 풍경화를 고집했던 과거와 달리 이탈리아 거장의 회화, 종교화를 집중적으로 사들인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미술사에서 중요한 작품에 매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에 길이 남을 미술관을 만들겠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세계대전으로 러시아가 재정적으로 궁핍해져 에르미타주 미술관 소장품이 시장에 비밀리에 흘러나오게 된다. 이른바 ‘마스터피스’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였다. 멜론은 거의 700만 달러 가까운 예산으로 21개 작품을 사들였다. 이때 컬렉션 한 작품 중엔 타티아노의 ‘거울을 든 비너스’와 라파엘의 ‘알바의 성모’도 포함된다. 이때 사들인 작품들은 모두 훗날 내셔널 갤러리에 기증됐다.

성공한 투자자에 은행가이자 정치인이며 재무상까지 지낸 멜론이지만 말년엔 상당히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1933년부터 3년간 탈세 이슈로 재판이 이어진다. 1930년대부터 사들인 마스터피스들을 개인 교육기부신탁에 넣어놨는데, 작품 가치에 따라 감면 받은 세금이 문제가 된 것이다. 세금을 감면 받은 작품에 대해 일반인들의 접근이 가능해야 하는데, 전부 수장고에 있었으니 ‘페이퍼 신탁’이라는 비난이 비등했다.

재판 중에 러시아 컬렉션이 세상에 드러나게 됐고, 원래부터 내셔널 갤러리를 지을 생각으로 한 것이냐에 대한 지루한 논쟁도 있었다. 3년이나 이어진 재판은 존 러셀 포프를 건축가로 지정하면서야 끝났다.

1937년 의회에서 결의안이 채택된 이후 미술관 설립은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멜론은 건축비로 1000만 달러를 기부하고, 동시에 자신이 소유하던 작품도 상당수 기증했다. 그러나 멜론은 1937년 세상을 떠나 미술관의 완공은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멜론의 통 큰 기부는 다른 컬렉터들의 참여를 끌어냈다. 필라델피아의 부동산 재벌인 조셉 와이드너(1871~1942)는 미술관 설립이 결정되자 2000점에 이르는 자신의 컬렉션을 기증했고, 금융재벌로 꼽히는 체스터 데일(1883~1962)도 240점 넘는 작품과 1200여점의 카탈로그, 1500권이 넘는 희귀 도서를 함께 기부했다.

멜의 타계 이후 그의 자녀인 폴과 아일사도 내셔널 갤러리에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67년 500만 달러를 주고 사들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도 ‘아일사 멜론 브루스 펀드’(Ailsa Bruce Mellon Fund)의 기금이 큰 역할을 했다. 폴은 40년간 미술관 이사회에서 임원을 역임했다. 폴 멜론 부부는 1000점이 넘는 작품을 기증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카나딘의 평가처럼 멜론은 좋은 씨앗을 심은 것이다. 가치를 알아본 이들이 자연스레 모였고, 훌륭한 나무로 키워내기 위해 미국의 슈퍼 리치들이 아낌없이 지갑을 열었다.

모여든 선의 위에서 내셔널 갤러리는 오늘도 미술관을 찾는 모든 이에게 무료로 문을 개방한다.

(다음 주 새로운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