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아트클럽

이상남, '유혹의 예술가'…썸타는 글로벌 화랑 페로탕 [박현주 아트클럽]

등록 2024-01-27 01:01:00  |  수정 2024-02-01 19:32:50

프랑스계 세계적인 화랑..서울 분점서 한국 작가 개인전

뉴욕↔한국서 활동 이상남 '기하학 추상화' 집중 조명

"단색화 이후 한국미술 발굴…'SF' 같은 풍경 작업 독특"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이상남 작가가 서울 강남구 페로탕 서울에서 개인전 'Forme d’esprit(마음의 형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2024.01.24.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인생은 유혹이다. '스스로 무릎 꿇게 만드는 환상적인 힘', 그 '유혹의 마라톤'에 한 화가가 올라섰다.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작가 이상남. '기하학 추상 화가'로 이름이 있지만 미술 시장에서는 낯설다. 미술계 평론가들도 '그 옛날 이상남?'이라고 다시 물을 정도다. 하지만 올해 2024년은 달라질 듯하다. 20년 간 한국 전시를 이어왔던 PKM갤러리와 연을 끊었다. 새해 벽두 그는 프랑스에 본점을 둔 세계적인 화랑 페로탕(Perrotin)과 손잡고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아카데믹하게 치렀던 이전 전시와는 다르다"며 "그림을 팔아보겠다"는 욕망이다. 1978년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1981년 뉴욕으로 떠나 이방인과 경계인의 삶을 미끄러지듯 살아냈다.

올해 나이 일흔 살. 40여 년 간 미치도록 그렸다. 그림 그리는 재미에 빠졌던 화가는 이제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사로잡고 싶다. 날아오를 준비는 끝났다.

"페로탕과의 첫 전시가 참 재미있네요. 이번 전시는 극장 무대처럼 꾸몄습니다."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에 있는 페로탕 서울 전시장은 이국적이다. 해외 작가들의 전시가 잇따랐던 덕분인지, 이번 전시도 한국 작가 전시가 아닌 듯한 분위기다.

미국 뉴욕과 경기 안양의 작업실을 오가며 이번 작품을 구상했다. 입구는 색과 기호들이 빠진 순한 작품으로 시작해서 안쪽과 2층 전시장은 마치 기계가 그린 듯 정교하고 치밀한 'SF 세계' 같은 그림으로 연출했다.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페로탕 서울은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 이상남의 개인전 'Forme d’esprit(마음의 형태)'을 새해 첫 전시로 열었다. 2024.01.24. [email protected]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페로탕 서울은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 이상남의 개인전 'Forme d’esprit(마음의 형태)' 을 연 서울 강남구 페로탕 서울 전시장. 2024.01.24. [email protected]


◆세계적인 화랑 페로탕, 서울서 한국 작가 개인전 이례적
페로탕의 이번 한국 작가 개인전은 이례적이다. 한국에 진출한 글로벌 화랑들이 자사 작가들의 전시 만으로 한국을 공략하고 있는 가운데 열린 이 전시는 한국 시장을 대하는 외국 화랑의 태도와도 맞물려 주목된다.

백효정 페로탕 서울 총괄 디렉터는 "한국 작가 개인전은 2019년 삼청점에서 박가희 작가 이후 이번이 두 번째"라며 "이번 이상남 개인전은 한국의 단색화 이후 발굴하는 한국 미술의 새로움을 조명하는 전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세계적인 화랑인 만큼 작가 선정과 전시는 엄격하다. 백 디렉터에 따르면 전시를 열기까지 각 지점의 큐레이터들과 브레밍 스토밍을 열고 아이디어를 공유한다.

이번 이상남 전시도 회의를 통해 "독창적이다"라는 지배적인 평가 속 전시가 추진됐다. 작품만 보고는 '젊은 작가인 줄 알았다'는 신선한 호평부터 '그림을 직접 봐야겠다'는 의견까지 나와 세계 미술시장을 휘감고 있는 페로탕에 '이상남' 이름 석자는 각인됐다.  

이상남도 이 점에 매료됐다. "세계 각국의 네트워크가 연결되어 일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놀랐다"는 그는 "한국 화랑들과 달리 페로탕은 SNS 팔로워 수만 해도 60만 명이 넘는다"며, '페로탕이 픽'한 자부심을 보였다.

프랑스계 화랑인 페로탕은 2016년 서울에 진출한 '외국 화랑 1호'다. 파리, 홍콩, 뉴욕, 서울, 도쿄, 상하이, 두바이 등 7개 도시에 분점을 둔 페로탕은 프리즈 아트페어가 상륙하는 서울에 공을 들였다. 강북 삼청동에 이어 2022년 강남 도산공원과 호림박물관 사이에 두 번째 전시 공간을 열었다. 한국에 진출한 외국 화랑이 ‘서울 2호점’을 열어 화제가 됐지만 ‘페로탕 도산파크’를 개관한 후 지난해 삼청점은 폐관했다.

페로탕은 '친한파 갤러리'다. 한국 작가를 적극적으로 후원·홍보하는 글로벌 화랑이다. 박서보·정창섭·이배 작가를 전속 작가로 맺어 해외 무대에 꾸준히 알렸다. 지난해 리움미술관에 바나나를 걸어 화제가 됐던 마우리치오 카텔란이 소속 작가로 페로탕은 타카시 무라카미, 피에르 술라주, 장 미셸 오토니엘, 엘름그린 & 드라그셋 등 세계 유명 작가들을 관리하며 세계 미술시장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백효정 총괄디렉터는 "이번 전시로 이상남 작가와 전속 작가 계약을 맺은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페로탕과 전속 계약을 맺기 위해선 다섯 번의 전시를 더 해야 한다"며 앞으로 홍콩, 파리 등에서 전시를 추진할 계획이다. 현재 이상남의 120호 크기 작품 값은 10만 달러 선에 책정됐다.

페로탕의 전속 작가 혜택은 특별한 건 없다. '글로벌 메가 갤러리'에 속했다는 소속감이 큰 에너지다.  "전세계 주요 8개 도시에 (2월에 문을 여는 LA지점 포함) 걸쳐 지점을 갖고 있는 갤러리인 만큼, 서구권과 아시아를 가리지 않고 작가들의 작품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플랫폼이 될 수 있다"는 게 강력한 무기다.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이상남 작가가 서울 강남구 페로탕 서울에서 개인전 'Forme d’esprit(마음의 형태)'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24.01.24. [email protected]

◆이상남 "내 작품, 낡은 개념 추상화 아닌 추상을 해부한 추상화"
“나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합리와 비합리, 아날로그와 디지털, 회화와 건축, 미술과 디자인 사이의 샛길을 건든다. 그 사이에서 산다. 회화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저 그림 얼마짜리야?'는 소리가 아무렇지도 않은 세상이다. 화가는 이제 명예 만으로 살 수 없는 시대가 됐다. 이상남도 이제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다.” 페로탕과의 전시는 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는 의지다.

그림 만큼은 자신 있다. "옛날 낡은 개념의 추상이 아니고 또 하나의 추상화로 추상을 끊임없이 연구해나가는 작가이자 새로운 작품"이라는 자부심이다.

그는 자신의 '기하학적 추상'에 대해 '추상의 해부학'이라고 했다. "추상이라는 살갗을 들쳐서 해부하고 있다"며 "진정한 의미의 추상을 해석하고 사유하는 작가"라는 입장이다.

'추상의 해부'는 역사가 깊다. 1981년 뉴욕으로 건너가기 전 실험 미술 전시회에 참여하며 눈을 떴다. 1972년, 1974년 앙데팡당 전시에 참여하면서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던 사진 매체를 활용해 '창문' 시리즈를 선보였다. 1970년대는 20대 이상남에게 회화에 대한 실험과 이론적 질문을 끝없이 제기하고 자신의 미학관을 찾아 나갔던 시기였고, 앙데팡당전 등을 통해 트렌드를 이끄는 박서보와 이우환의 반전통적인 예술의 방식과 매체를 고민하던 때였다. 1979년 제15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여하면서 국제적 행보를 넓혀나갔다. 1981년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열린 'Korean Drawings Now'라는 그룹전에 참여하면서 그는 뉴욕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런데 뉴욕은 한국에서 열기였던 미니멀리즘과 개념 미술이 사라지고 있었다. 독일 표현주의, 신표현주의, 에릭 피슬이나 데이비드 살레 등이 제작한 회화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상남은 다양한 개념과 미술가, 미술 기관 등이 범람하는 뉴욕의 미술계에서 다시 정체성을 찾아야 했다.

'웬만해선 알아주지 않는' 나라에서 그만의 언어와 차별화를 위해 영혼을 갈아 그림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1997년 현대화랑에서 연 귀국 전시를 시작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차별화했다. 숫자, 부호, 문자나 암호 등과 같은 기호들이 존재하는 특유의 ‘설치적 회화(installation painting in situ)’를 정립해나갔다. 

40년 이상 축적한 이미지는 외계적인 느낌까지 풍긴다.  기계 내부 설비 장치나 건축 설계도처럼 보이지만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공존하고 있는 21세기 우리의 삶 자체를 투영했다.

즉흥적이고 가벼워진 현재 미술 시장에서 추상의 추상을 해부한 모더니즘적이고 개념적인 그의 작품은 어찌 보면 비평가들의 '마지막 만찬'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미술평론가 정연심 홍익대 교수가  "삶의 궤적과 여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압축된 마음의 풍경화(compressed landscape)이다"라고 쓴 진지한 서문이 그렇다. "이상남의 작품은 형식적으로 보면 기하학적 추상 작업이지만 그의 작업에서는 이미지의 형태도 내용도 서로 고정된 관계를 끊임없이 부정하면서 생기는 의미의 균열과 파열이 생겨난다. 이 균열은 때로는 긴장과 위트를 유발하는데, 그의 그림이 뚜렷한 형태들을 재현하지 않는다는 다양한 인종만큼이나 많은 서로 다른 이질적인 문화와 언어의 속성을 이상남은 신추상의 방식으로 기하학적 풍경화를 만들어낸다"고 평했다.

associate_pic
Sang Nam Lee, Forme d’esprit (J264), 2014, Acrylic on panel, 162.4 × 130.4 × 4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재판매 및 DB 금지


◆복잡한 이유? "다만 몇 초라도 붙잡기 위해"
그림은 사람이 그린 것 같지 않다. 마치 기계가 뽑아내거나 실크 스크린, 프린트를 한 것 같아 봐도 봐도 믿기지 않는다.

색들의 다른 풍경이 전개되고 톱니바퀴 같은 기호들이 맞물려 미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보기에 매끈한 작품은 실제로는 노동집약적인 공력이 들었다. 칠하고 덮고 갈아내기를 50~100회 반복하는 수행적인 과정을 통해 완성됐다.

그는 "마치 공예가처럼 특정한 이미지들을 조합 시켜서 다듬고 갈고 덮고…이러한 작업들을 반복하면서도 예기치 않는 일이 벌이는 쾌감에 더욱 충실 한다"고 했다.

"끊임없이 색깔의 낯섦을 주면서 끌고 가는 것. 오히려 그 길로 가본다. 실수가 다른 걸 보게 만드는 게 허다하다. 모든 것은 기획 돼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래서 작품은 한번에 나오지 않는다. 3개월 6개월 1년이 걸리기도 한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싹 갈아엎고 다시 시작하기도 한다.  엄청난 아이콘과 색깔, 형태 등 수천, 수만 개의 양을 가지고 있다. 때때로 겹쳐 놓으면 예상치 않은 결과가 나온다. 99%는 전략적이고 논리적이지만 1%의 세계는 전혀 모른다. 운에 맡긴다. 던져 놓고 부셔 버린다.

"쌓아 올리다가 싹 부셔 버리고 주시해보는 것. 뭔가 살아있고 예측하지 못한 것이 나올 때 매력을 느껴 또다시 만들어 나간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다."

이상남은 '유혹의 예술가'로서 여백을 두지 않는다. "빈 공간도 많고 미니멀한 작품을 하는데 생각들이 많아지더라"며 "관람자의 자기 의식이 투영되는 늪에 빠지는 것"을 예방하는 차원이라고 했다.

그는 "관람객들이 작품을 보며 '이거 같네, 이거 같네'하며 자기들의 얘기를 엮어 나가는 게 재미있다"며 "뭔가 강요하지 않고 참여 시켜서 넌지시 보여주는 작품"이라면서 어렵게 보지 말라고 했다.

"이건가?" 하는 생각이 낚시다. "무용수들이 예기치 않게 사건들을 전개해나가는 것처럼 슬쩍 비켜나가고 미끄러져 나가, 보는 사람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는 것. 다만 몇 초라도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는 것, 그게 나한텐 중요하다."

뉴욕에서 무용과 연극을 유독 많이 봤다는 그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비합리적인 요소와 매력적인 요소가 자신의 작품에 많이 반영된 것 같다고 했다.

작품 내용에 대해 말을 아끼는 그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 상징을 물었더니 "선과 곡선의 싸움은 통합으로 완성된다"는 힌트를 줬다. "직선은 죽음, 곡선은 삶을 상징한다. 그래서 중성적인 색을 많이 쓴다. 원색의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요소보다는 감싸주고 중화 시키는 색을 쓰는 이유다."

미국에서 동료 작가들이 '이상남의 기하학을 보면 뭔가 다르다'는 평가를 한다는 이야기를 에둘러 전했다. "마르쉘 뒤샹이 마치 큰 연못에서 낚시를 하는 것처럼, 컨템포러리 아트가 답을 알게 되면 볼게 없는데 너의 작품은 또 다른 것들이 아침마다 발견되는 재미가 있다"는 것.

결국 그는 "내 위치는 작품과 관객의 중간에서 지휘하고 매칭하는 역할"이라며 "관객들을 기하학적 이미지로 보여지는 바다에 빠트리고 싶은 재미를 느끼고 싶다"고 했다. 자신은 이미 자유자재로 이야기를 만들 수 능력이 있다는 자신감에 찬 미소를 보였다.
associate_pic
Sang Nam Lee, Forme d’esprit (H29), 2022, Acrylic on panel, 183.6 × 152.8 × 4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재판매 및 DB 금지


정밀한 그림처럼 그는 녹슬지 않는 손맛을 자랑한다. 매일 매일 밥 먹듯 하는 드로잉 덕분이다.

"피아니스트가 손을 풀기위해 매일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화가인 나는 머리하고 손하고 어색해지지 않게 매일 매일 스케치를 한다. 지금까지 그린 것 만해도 1만 장이 된다. 스스로 만들어낸 색도 수백 가지다. 색을 담은 수첩이 있을 정도"라고 했다. 붓 질을 했는데 붓 질을 안 한 것처럼 보이고, 그렸는데 그리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마술 같은 이상남 표 그림의 힘'이다.

매끈하고 미끈한 작품. 장인처럼 일하지만 내세우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작가로서 경제성은 피해갈 수 없는데 업으로 하니까 무조건 그린다'는 그는 무식하게 일한다고 했다. 작업실에서 7일 간 박혀있는 그에게 미련하다는 동료들의 말에 이제는 쉬는 날은 쉬기로 했다. "머리를 비워야지. 맨날 그림 생각만 하니까 다른 일을 못하는 문제가 있다."

그러면서 그는 고령의 나이에도 그림에 푹 빠진 전업 화가의 면모를 보였다. "살아가면서 재미를 느끼면 빠지지 않나요?. 똑같은 거지. 무엇이든 가치 이전에 재미를 느끼는 거지. 다 그렇게 하지 않나요?"

복잡다난한 그의 그림은 '그 모든 것의 장르'를 품었다.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는 순간부터 그의 계략에 빠져든다. "완성되는 작업이 아닌 골치가 아프게" 작업하는 그는 여전히 '청춘의 샘'을 가동하고 있다. 수수께끼 같은 상징과 기호를 생각 장치로 묶어 놓은 그는 "내 작품의 낯섦에서 (관객들이) 몇 초 간 사유 할 수 있다면 바랄게 없다"고 했다.

그의 바람은 성공적이다. 작품은 눈길과 발길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프랑스계 화랑인 만큼 전시 제목은 'Forme d’esprit(마음의 형태)' 프랑스어로 달았다.

보면 볼수록 생각이 확장되고 미끄러지는 '이상남 그림의 신세계'가 열릴 것인가? 이제 페로탕의 은밀하고 우아한 '마음의 형태'를 보여야 할 때가 시작됐다. 전시는 3월16일까지.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